오늘의 묵상

[인자야 너는 두로를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으라]

꽈벼기 2019. 8. 24. 07:50

[인자야 너는 두로를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으라]

(에스겔 27:1~25)

 

1~11, 상업도시 두로의 명성과 힘에 대해 중점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분위기를 전환하여 두로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1, 2절은 두로를 향해 애가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합니다. 3, 4절은 두로의 아름다움을 감탄조로 드러냅니다. 5~11절은 배의 건조 과정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로의 미를 묘사하면서 직접적으로 감탄을 말하지 않고, ‘두로야 네가 말하기를 나는 온전히 아름답다 하였도다라는 간접적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본문에서 노래하는 두로의 영광이 절대 진정한 찬사가 아니라, 두로의 나르시시즘적인 자랑에 대한 질책의 성격이 혼재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영광과 번영을 누리고 있는 두로를 위하여 애가를 짓도록 명령합니다. 이러한 시각은 두로의 성공이 결국 파멸로 들어가는 올무가 될 것을 뜻합니다. 두로는 자신의 물질적 풍요에 함몰되어 진정한 영적 시각을 상실함으로써, 열국의 비웃음을 살 정도로 파멸하게 됩니다.

 

3절에서 두로는 고대 근동 지방 무역의 중심지로서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습니다. 두로의 지정학적 위치는 당대 최고의 도시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두로는 북쪽으로는 시돈 항을, 남쪽으로는 애굽 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항구는 성벽 안에 있었고 외벽은 바위로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최고의 교역 수단이었던 배가 움직이기에 용이한 섬이라는 이점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조건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감사할 조건이지만, 두로는 오히려 헛된 자부심을 가지므로 복을 재앙으로 바꾸고 말았습니다.

 

5~7절에서 두로는 최고급 무역선으로 비유되었습니다. 두로로 비유된 배의 판자는 스닐의 잣나무’, 돛대는 레바논 백향목’, 노는 바산의 상수리나무등으로 만들었으며, 애굽의 수놓은 가는 베로 돛을, 에리사 섬의 청색과 자색 베로 차일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각종 재료는 당시 고대 세계 초고급품으로서 두로의 영광을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두로는 가장 훌륭한 제품을 사용해서 만든 배처럼 놀라운 영광과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이방 민족을 용병으로 모집하여 약한 군사력을 보충했습니다.

 

12~25, 본문은 당시 세계적으로 다양한 국가들과 폭넓은 교역을 하고 있던 두로의 무역 상황과 다양한 상품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거대한 상업 도시의 규모와 세력을 분명하게 제시하기 위해 매우 장황하게 교역 대상국과 상품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12~23절을 보면 두로의 무역 상대국은 대단히 광범위한 지역을 포함합니다. 두로는 서쪽으로는 다시스, 헬라, 등과, 동쪽으로는 에돔, 다메섹, 아라비아, 메소포타미아 등과 활발한 무역을 펼쳤습니다. 또한, 품목에서도 각 지역의 모든 특산물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무역 상황을 구체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두로가 당시 명실상부한 지중해 연안의 중심지임을 입증하고 아울러 상업적인 번영과 풍요의 정도를 부각하고 있습니다.

 

25절에 두로의 무역은 다시스의 배들을 이용하여 물품을 교역함으로 놀랍게 번창했습니다. 여기서 다시스의 배들은 아마도 대양에서 물건을 운송할 수 있는 커다란 선박을 의미합니다. 이는 두로의 목재를 이스라엘로 운반하기 위해 히람과 솔로몬이 만들었던 것과 같은 종류입니다. 두로는 당시 가장 활발한 교통수단인 대규모의 배를 통해 각종 토산품과 특산물을 세계 각국으로 보냄으로써 엄청난 부와 영화를 누렸습니다.

 

이러한 물질적 풍요는 두로를 교만하게 만들었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은 단순한 경제적 효용 가치가 아니라 종교적 성격을 띤 우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재물은 양립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 누구나 자기애를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과 정도에 있습니다. 일신의 유익만을 도모하기 위한 쾌락이나 지식, 그라고 안전만을 사랑한다면 이는 진정한 자기 사랑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기 삶을 파탄시키는 해독이 될 뿐입니다. 진정한 자기 사랑은 나를 부인하고 이웃을 형제로 대하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집착, 그것에서 벗어나면 날수록 우리는 더욱 참답게 자기 자아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부정한 소득은 평안을 주지 않습니다. 재물이 주님의 자리를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음을 기억하고 부정한 소득을 구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버리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