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3:1~17)②
하나님의 최대 관심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다루기에 앞서 인간 사랑을 다루는 것은 나름대로 의의가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의 이웃을 위한 열정과 사랑의 냉랭함으로 시작되는 성도 간에 믿음의 붕괴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형제 사랑입니다. 1절에 ‘계속하고’라는 강한 어조의 명령형이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지속적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성도들이 자기 고난 속에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한다면 겹겹이 쌓인 모든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손님 대접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개방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집과 교회를 개방하여 도움이 필요한 형제들을 맞아들여 기꺼운 마음으로 대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집과 교회를 개방해 놓고 어떤 사람이든 사랑으로 맞이하는 자의 처소를 찾아가실 것입니다.
또 갇힌 자를 생각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기본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우고 있는 양심수들이 갇혀 있었습니다. 부당하게 투옥된 모든 사람,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다는 이유로 고난 받는 형제들에 대하여 항상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순결과 자족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거룩의 속성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에게 비추어 볼 때 어긋나는 비윤리성을 고발합니다. 그것은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는 결혼의 가치성 몰락과 돈을 사랑하는 물질주의입니다.
결혼이란 도덕적 순결과 서로에 대한 영원한 책임성을 전제로 합니다. ‘결혼을 귀히 여기고’라는 말은 ‘결혼을 값지게 하라’ 또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걸맞게 결혼 생활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저자는 혼인을 귀히 여길 것과 아울러 결혼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행위, 음행과 간음에 대해 반기를 들었습니다.
돈에 대한 탐욕과 성적 방종은 상호 연관이 있습니다. 지나친 부는 종종 육욕의 유혹에 쉽게 빠지게 합니다. 여기서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소망을 둔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라고도 말했습니다.
주는 어떤 분이신지 말씀합니다.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오’ 저자는 하나님께서 야곱(창 28:15)과 여호수아(수1:5)에게 주신 신변보장에 대한 약속의 말씀뿐 아니라, 고민에 빠져 있던 시편 기자(시편 118:6)가 마침내 찾게 된 평안에 대해서도 독자들이 상기하도록 서술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거할 때 비로소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수송아지를 잡아 그 피는 지성소로 가지고 들어가고 제물은 영문 밖에서 불태웠습니다. 이런 제사를 통해 대제사장의 죄와 백성의 죄는 속죄 받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을 믿었으므로 성문 밖에서 죽으셨습니다. ‘장차 올 영원한 도성‘이 없는 고난은 절망 그 자체입니다. 이 도성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자에게 소유됩니다. 부활의 경험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와 더불어 고난을 나누는 것은 생활 가운데서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성문 밖 개념은 ‘구원의 새로운 장소’를 뜻합니다. 구약 시대에 성전은 예배의 장소로서만이 아니라 구원의 중심지로도 이해됩니다.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 수양과 숫염소의 피를 뿌리고 그다음에 살아있는 염소를 취하여 그 위에 안수하고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짊어지게 해서 광야로 내보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장소는 중심에서 ‘주변으로’이동됐습니다. 예수님은 추방당하고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광야와 같은 곳에서 죽으셨습니다. 추하고 불결한 땅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땅이 되었습니다. 구원이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실천적 면을 내포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예배란 성문 밖에서 고난 겪으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감사의 찬미를 드리는 일이요,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 나눔과 섬김의 사람을 사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7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되 그 행실은 모범적이어야 합니다. 17절에서 지도자는 성도들의 영혼을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타인의 생명을 구원하고 지키기 위해 늘 깨어 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즐거움으로 합니다. 이는 위로부터의 권위를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의 즐거움은 현세의 만족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소명 아래서 삶을 영위하므로 사람에게서 전적으로 자유로우나, 그 자유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그 제한은 섬김입니다. 자유롭지만 종입니다.
★종종 세상의 것들에 미혹되어 돈이나 재물에 의해 근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음을 깨닫고 그 약속을 굳게 붙들어 여호수아와 갈렙같이 두려움 없는 신앙을 소유하며, 또한, 욥과 같이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이다”(욥1:21)라고 고백해 함을 깨닫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같으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의 삶에 있어서 만족할 줄 모르는 신앙이 있습니다. 불교도 욕심을 버리라고 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이교도들보다 더 큰 욕심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올바로 만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한다면 항상 어떤 일에 있어서든지 만족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순결하길 원합니다. 결혼 생활과 금전의 문제에서 우선순위를 가려내게 하시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옵소서. 하늘나라의 산 소망으로 이 세상이 구별되어 살길 원합니다. 오늘 하루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내가 찬미의 제사를 드리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