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마태복음 28:1~20)②
1~10절,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은 천사를 통해 부활의 소식을 가장 처음 듣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처음으로 만나 뵙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두 여인은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무덤을 지키는 자들도 부활을 목격하기는 했으나, 그들은 무서워 떨기만 했을 뿐 여인들이 느꼈던 큰 기쁨이 없었습니다.
부활의 사건을 목격한 사람은 다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이론적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논쟁을 통해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기쁜 일이면 부활을 전하게 될 것이며 부활을 제대로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부활의 감격과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무덤 입구를 막아 둔 큰 돌이 사람의 손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으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인봉되었고, 파수꾼들이 지키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과 관련된 사람들은 아무도 손을 댈 수가 없었는데, 그 문이 사람의 도움이 필요 하지 않는 특별한 방법으로 열렸던 것입니다.
천사가 무덤을 찾아온 여자들에게 전한 소식은 예수님께서 말씀대로 살아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주의 제자들을 통하여 인간이 주님을 믿기에 얼마나 더디고 힘든가를 보게 됩니다. 부활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거듭 들었음에도 그들은 주님을 만나러 무덤으로 갔던 것입니다. 정말 믿는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수많은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불경건한 자들이 주의 부활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은 능력의 하나님으로 무덤 문을 여시고 주를 사모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이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런 사람들 속에 살아 계시며 역사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누구에 의해서도 제한을 받지 않으며, 미미한 영향조차도 받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가만히 생각하게 될 때, 또한 그분께서 하신 말씀을 묵상할 때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11~20절, 11~15절은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뵈온 후에 그 벅찬 감격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급히 발걸음을 재촉하는 여인들과는 정반대로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분주히 애쓰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파수꾼들로부터 실제로 일어났던 일의 자초지종을 들었음에도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을 날조하여 헛소문을 두루 퍼뜨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실로 그들은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할’ 자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꾸민 거짓말은 그 자체 내에 명백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바, 우리는 이러한 모순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긴박하게 그리고 억지로 날조하였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들 중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고서도 의심하는 자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은폐하기 위해 허위 날조를 꾀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예수 부활을 엄연한 역사성을 더욱 확고히 증명하는 일에 일조하였을 뿐이라 하겠습니다.
16~20절에는 지상 대 명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권세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대 사명을 위임하시기 전에 주님의 권세를 상기시킴으로써 제자들이 수행해야 할 사명의 근거를 확실히 밝히셨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모든 것이 충만하게 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으며 만물이 다 내 것이라는 무한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명령은 첫째로 가서 만백성에게 복음을 증거하라는 내용입니다. 이는 복음의 우주적 성격을 시사한 말씀으로써, 당시 유대교의 편협한 국수주의의 영향 하에 있었던 제자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기까지는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했던 것입니다.
둘째로는 세례를 베풀라는 내용입니다. 물론 형식상의 세례 자체가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항인 것은 아니라는 점은 십자가상에서 회개한 도적의 경우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다만 이 세례는 성도의 내적 신앙 고백을 외적으로 표현한 상징적 행동으로서, 성도 공동체 앞에서 자기의 신앙을 공표함으로써 스스로 결단과 근신에 나아가도록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예식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이 세례와 관련하여 본문에서는 삼위일체에 관한 언급이 나타나는데 이는 전혀 의외의 내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성부 하나님에 관해 말씀하셨고 공생에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보혜사 성령에 관해 분명히 언급하신 바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이 명령은 훈육에 관한 내용입니다. 복음 사역자들은 복음 증거와 아울러 그 증거를 받아들인 자들을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시키는 사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께서, 무리와 항상 함께하시리라는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 이보다 더 큰 축복의 약속이 있을 수 없으며, 이보다 더 큰 위로의 약속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위대한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늘 주와 동행하는 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 자체가 우리 구원의 영원한 보증입니다. 그분을 일으키셨던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우리 모두를 일으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일은 현실적으로도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들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요컨대 죽음보다 생명이 강하고, 증오보다 사랑이 강하며, 불의보다 정의가 강하다는 점을 확연히 변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더욱 더 깨달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에 박차를 가해야 하겠습니다, 이 세 가지 명령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에 앞서 제자들을 향하여 최후로 들려준 그들에게 맡겨진 과제인 것은 말할 나위 없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가 종사하는 직업, 성별, 나이, 언어 등은 제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정신과 행동의 지향점은 분명 같습니다. 즉 우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며, 주께서 명하신 것을 가르쳐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실로 이런 주의 명령은 주의 사랑을 경험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지상 최대의 과제인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집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묵상하며 삼일 만에 부활하심을 기뻐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길 원합니다. 부활을 더욱더 생생하게 느끼며 부활의 복음을 전하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불신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돕길 원합니다. 주님의 부활에 대한 분명한 체험은 주님을 만나고 성령께서 나와 함께함을 확신할 때 일어납니다. 언제나 부활의 증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