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꽈벼기 2019. 4. 10. 07:34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마태복음 25:14~30)

 

하나님 나라의 바람직한 일꾼의 자태를 묘사하는 이곳의 달란트 비유가 장사하는 사례에서 착안하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합니다. 특히 불공정한 분배와 가진 자의 못 가진 자에 대한 착취를 세계 곳곳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목격하고 있는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부익부 빈익빈이라고 하는 자본주의적 폐단을 연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를 특정 이념에 대입하려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인간의 유한하고 불완전한 지식에 억지로 끌어 맞추려는 거칠고 나쁜 노력일 뿐입니다.

 

여기서는 창조의 원리로서 무에서 유를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 역사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을 통해 시종 창조적 결실을 보아오셨습니다. 특히 구원의 복음과 관련된 사역은 부패하고 죽은 자들을 영원히 썩지 않을 참 생명 가운데로 건져 올린다는 점에서 위대한 새 창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자기 본위의 틀에 갇혀 출구 없이 계속 자기의 이익만을 채우는 사해와도 같이 부패한 냄새를 풍길 것이 아니라, 한 알의 밀알로 썩어져 삼십 배 백배의 창조적 결실을 맺는 이타적 삶에로 요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창조성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모두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각기 갑절의 이익을 남겼습니다. 이들을 통해 우리는 진취적이고도 적극적인 신앙의 면모를 목도하게 됩니다.

 

때로 우리는 겸손의 미덕을 오해하여 매사에 뒤로 물러서기만 하는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경우를 많이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소극성은 창조적 결실은커녕 정체와 나아가 퇴보를 가져올 뿐입니다. 장차 되어야할 일의 결과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고 조바심하는 자는 아무런 일도 이루어 내지 못하며 어떤 공동체 내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유명무실한 존재로 낙인찍힐 뿐입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비록 여러 가지 결점과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을 도모하는 자는 다소 시행착오를 겪을지는 몰라도 창조적 결실을 볼 수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분야에 있어 위대한 성공자로 출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면서 치밀한 사전 계획도 중요하지만,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실패하면 잿더미에서라도 다시 일어서리라고 하는 불굴의 진취성이 무엇보다 긴요하게 요청됩니다. 이것이 진취적인 신앙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의 초점을 한 달란트 받은 자에게 초점이 모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회계할 즈음 주인에게 고백한 그의 말을 통해 우리는 한 달란트 받은 자의 부정적 심리 상태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그는 겉으로는 겸손한 듯 해 보이나 실상은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나태한 심리를 보여줍니다.

 

다음으로 그의 말 속에는 고작 한 달란트밖에 받지 못한 사실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담겨 있으며 또한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 받은 자들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느끼는 상대적 열등감이 반영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맡은 일이 무엇이든지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양한 달란트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달란트들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유익하게 하는 공동의 목적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마치 눈이 손 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머리가 발 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지 못하듯이 모든 성도는 각자의 받은 대로 은사가 지닌 고유한 특성을 깊이 인식하고 받은 대로 소명에 충실하면 됩니다.

 

주인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종들 가운데 두 종은 열심히 일하고 좋은 결과를 얻어서 칭찬을 받았으나 한 종은 크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결말이 크게 차이가 나게 된 것이든 능력의 차이나 맡긴 일의 크기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차이는 주인을 대하는 마음 자세의 차이요 맡긴 일을 대하는 차이였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들을 주님께 맡기셨다고 청지기의 사명으로 책임을 감당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내 처지나 형편에 대해 불평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책임을 감당하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