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누구든지 크고자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꽈벼기 2019. 3. 25. 07:41

[누구든지 크고자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태복음 20:17~34)

 

17~19절은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시면서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신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을 능욕하고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한 대적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눈에는 곧 당도할 예루살렘이 예수님을 새 왕으로 추대하는 정치적이고 지상적인 왕국의 도읍으로 기대되었습니다.

 

세 번에 걸쳐 수난을 반복하여 예언한 것은 십자가의 사건이 구속사에서 차지하는 실로 막중한 비중을 강조하기 위함임과 아울러 제자들을 위시하여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무리의 위와 같은 그릇된 천국관 내지는 그릇된 메시아 관을 바로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세 번째 예수님의 수난 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예고되고 있습니다. 압축된 요약인 셈입니다. 그런데도 자발적으로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셨던이사야 50장의 말씀처럼 이 말씀에 대하여는 마가복음 10장에서 더욱 상세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20~28절의 말씀은 세베대의 두 아들의 야심이 나타납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가 있고난 뒤에도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고 하는 경쟁 심리를 노출 시키더니 이번에는 한술 더 떠서 마음에 품은 세상 야욕과 시기심을 더욱 적나라하게 노출 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점점 가까워져 옴에 따라 그와는 정반대로 제자들의 교만과 탐욕이 더욱 심해져 갔다는 사실은 묘한 아이러니를 던져주며 인간의 죄악 된 본성에 대해 깊은 절망을 갖게 합니다.

 

진정 세상의 논리로 생각할 때는 제자들의 야심은 오히려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족과 일터를 버리고 일편단심 주를 따라 동고동락하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위대한 능력과 지혜는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과 왕 되심을 제자들이 믿게 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사실 로마군의 살벌한 군마와 창검이 요소요소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삼는 메시아 왕국이 조만간에 로마 통치를 몰아내고 세워질 것이라는 믿음은 대단한 확신과 용기에서 기인하였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거듭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메시아 왕국의 본질이 무엇이며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기껏해야 인간적 용기와 충성을 드러낼 뿐이었고 상대적 경쟁의식과 시기심에서 놓여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 편 본 절의 평행 구절인 마가복음 10:35~45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좌우편에 앉게 해줄 것을 예수님께 구하였습니다. 여기서 세베대의 아내는 그 두 아들의 야심을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그들을 대신하여 예수님께 간구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육신의 혈통인 예수님의 이모였으므로 자신이 간구하면 더 효력이 있으리라 판단했는지도 모릅니다.

 

29~34절은 두 소경을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할 때 일어난 일로서 공관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와 누가는 눈먼 소경 한 사람만을 언급하였고 마가는 그의 이름을 바디메오라고 밝혔습니다. 아마도 마태는 더욱 상세하게 기록하기 위하여 소경들의 숫자를 적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9:27-31에도 본문과 유사한 치유 기사가 나오지만 각기 다른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며 강조하는 내용 또한 차이를 보입니다. 9:27-31절은 두 소경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본문은 소경들의 간절한 열성과 예수님의 자비로우신 긍휼을 부각합니다.

 

한편 본문은 28절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고 있음을 바로 보여줍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능욕의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목전에 둔 시점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닥칠 엄청난 시련에 대한 염려와 고뇌에 사로잡혀 있기는커녕 병들고 약한 자들에게 끊임없는 연민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부터가 죄인들을 향한 크신 긍휼에서 기인하였음과 같이 그분은 십자가의 참혹한 고통 중에 처한 상황에서도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연민을 보이셨습니다. 실로 주님의 생애 전체는 온전히 남을 위한 헌신과 희생의 삶이었으며 겸손과 봉사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흔히들 남을 부리는 자는 높은 자요, 남의 수하에 있는 자는 비천한 자라는 통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통념은 예수님의 정신과는 정반대가 되기 때문에 마땅히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남을 지배하려는 잘못된 경향은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작용하고 있는데 이런 일은 참으로 불행한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의 교만을 깨뜨리고 다른 사람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을 위해서, 그리고 그분을 본받기 위해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진정한 섬김의 도를 실천함으로 장차 주의 나라에서 큰 영광과 존귀를 받기를 원합니다. 한편, 이 소경들이 무리의 책망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던 이유는, 물론 그들의 말대로 눈을 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외침 속에서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로 인정하고 그 메시아에게 그들의 문제를 고백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신앙이 결국 그들의 평생의 문제를 해결하게 한 것입니다.

    

나는 주위 사람들의 생각이나 주님의 생각에 대해 깊이 고려하며 행동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꼭 자녀가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사람이나 사물에 마음을 빼앗길 때 세베대의 여인처럼 실수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변화가 필요합니다. 언제나 섬기는 자세로 주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이 소경이 가졌던 분명한 확신과 간절함이 나에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내 기도에도 주님께 향한 확신과 간절함으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