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꽈벼기 2018. 9. 9. 09:2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11)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이 누리게 되는 첫째가는 축복을 하나님과 화평이라고 말합니다. ‘화평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느끼는 데서 오는 양심의 평정을 뜻합니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인 절대자와 화목한 관계에 들어갔다고 하는 깨달음에서 시작되는 것으로서 단순한 감정의 평온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얻어지는 양심의 평화를 뜻합니다.

 

여기에서 평화의 의미는 본서 첫 부분에서 바울이 강조한 하나님의 진노의 개념과 대조를 이룹니다. ‘진노는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 즉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소원한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 반대의 개념인 화평은 하나님의 심판의 철회를 뜻하며 하나님과의 조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하나님과의 화평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 화평이라는 단어를 메시아적 구원의 의미와 거의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 속에서 하나님의 평화가 역사 가운데 어떻게 일어났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가운데 불화를 없애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것과, 하나 된 그들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시키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에 들어간 그리스도인들은 생의 완전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전에는 죄로 인해 불안과 공포 가운데 살았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의 은혜로 이 모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그 은혜의 감격 속에서 하늘의 평화를 누리고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사이에 놓여 있던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님과 매우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부자지간의 화평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축복입니다.

 

한편, 칭의함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두 번째 축복은 은혜에 들어감을 얻는 것입니다. 이는 예배하는 자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간다는 뜻과 인도함을 받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과 화평의 상태를 다른 측면에서 묘사한 것으로서 은혜의 자리는 예배의 근원적 동기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적인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은혜의 자리에 나가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 예배하며 그분의 영원한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율법에 의해 정죄함을 받은 자들은 그 누구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없으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함을 받은 자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대할 수 있는 축복을 얻게 된다는 것이 바울의 복음 논리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그 은혜의 감격에 도취하여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현실 생활에 관하여서도 권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 생애는 물론 다른 믿는 이의 생애까지 둘러싸고 있는 환난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 가운데 환희의 기쁨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미래의 영광에 이르는 길에 도사리고 있는 고난과 핍박의 실재를 절실히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는 비결을 제시합니다.

 

환난에 대한 바울의 특이한 태도는 그것을 즐겁게 맞이하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도 기뻐하라고 합니다. 미래의 영광을 바라는 환희의 즐거움 때문에 환난까지도 기꺼이 맞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태도는 현재를 미래의 영광으로부터 분리해 놓은 필연적인 시련으로서의 환난에 단지 수동적으로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는 환난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자기와 연합하여 환난을 이기고 영광을 기대할 것을 간절히 염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환난 중에 함께 하사 위로해 주시니 능히 그럴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환난의 정체는 인간의 삶 속에 찾아드는 여러 가지 고충의 결과로서의 환난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환난은 독특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며, 그러한 환난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를 나타내는 기회를 주며, 결국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유익이 됩니다. 모든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이러한 특징을 가집니다. 이러한 환난들은 인내의 결실을 가져오며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환난의 끝은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환난 가운데서 즐거워하거니와 그 이유는 환난은 소망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소망으로 시작한 바울의 복음 원리는 소망으로 종결짓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영광의 세계를 보고 함께 누릴 소망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부터 기뻐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신자들의 소망은 내세에 누릴 영광과 상급에 대한 약속을 바라보는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성결하게 지켜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칭의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새 생명에 관하여 진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생명의 세계에서 그 생명을 만끽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새 생명이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고백문과도 같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일이 아니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표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먼저 연약한 이간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에게 나타내신 사랑은 죄악에 대하여 연약하고 무능한 자들을 불쌍히 여겨 구원하신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강함과 대조되는 인간의 약함은 자신의 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처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연약한 인간을 위하여 가약대로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정된 때, 곧 만기의 때에 인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은총을 나타내시고 새로운 소망과 생명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조인을 위하여 성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의인을 위하여도 대신 죽겠다는 사람이 없거니와 더욱이 하나님이 없는 불경건한 자를 위하여 죽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내어 타락하여 진노 가운데 있는 죄인을 위하여 죽게 하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였습니다. 무죄하고 성결하신 독생자 예수를 희생 제물로 내어주셨다는 것은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파격적인 은혜요 가장 큰 특전입니다. 의롭다 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무한대의 하나님의 사랑 안에 풍성히 거하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온 자들은 새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들은 의롭다 함을 얻어 진노에서 구원받았거니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옛사람의 죽음과 함께 새 생명으로 중생하게 된 것입니다. 칭의함을 받기 전에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했으나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되었으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인간이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게 되며, 하나님과 원수 상태에 있던 인간이 이제는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이루게 되며, 죽은 상태에 있던 인간이 이제는 새 생명을 받아 새로운 영적 삶을 영위하게 된다는 것이 바울이 역설하는 그리스도인의 축복의 모습입니다.

 

환난 중에도 낙심치 않고 소망 중에 즐거워합니다. 구원의 기쁨과 감사가 처음 믿을 때처럼 넘치길 원하며 환난 중에도 인내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복음을 주셔서 기쁨의 삶을 누리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