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요한복음 20:11~23)
마리아는 아직 어둠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슬픔은 예수의 죽음에 설상가상으로 시신의 조난이라는 절망이 겹쳐져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슬픔과 통곡은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에 동산의 음산한 분위기를 더욱 비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슬픈 눈물은 부활의 아침에 매우 민망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녀에게 부활이 직접적인 첫 증거가 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두 천사나 예수는 한결같이 그녀의 울음에 대해 언급 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녀의 슬픔 정도를 잘 말해 줍니다.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 마리아의 첫 마디는 ‘랍오니’라는 칭호입니다. 이 호칭은 기존의 랍비에 대한 최상의 높임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예수에 대한 도마의 인식과 관련해 볼 때 아직도 그녀가 예수에 대한 정확한 믿음을 가졌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한편, 우리는 마리아에 대한 예수의 말씀 가운데서 독특한 용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와 ‘너희 아버지’ 그리고 ‘내 하나님’과 ‘너희 하나님’이 그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한 분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자신과 제자들에게 선별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예수의 열 제자는 마리아의 증언을 반신반의한 듯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도 유대인들의 박해가 두려워 문을 잠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빈 무덤과 곱게 개어진 세마포와 수건, 마리아의 증언 등은 그들을 혼란 가운데 빠뜨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어떤 이들은 마리아의 증언을 환상으로 치부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도마처럼 예수의 손과 옆구리를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믿었던 사실은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다가오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곧 아버지께로 올라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곧 달려가서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적으로는 그들을 떠나실 것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 그들과 더 친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으로 초대를 받을 것입니다.
두려움과 초조한 속에서 문을 잠그고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라 도리어 위로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며 그분과의 교제가 날마다 깊어지길 원합니다. 나의 잘못 때문에 두려워 떨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에서 용서받았음을 믿고 이 시간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니다. 내 힘과 의지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