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

꽈벼기 2019. 3. 5. 07:53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

(느헤미야 5:6~19)

 

6~13, 당시의 백성들이 호소한 사회적 부조리에 대하여 느헤미야가 민감히 대처해 수습하는 장면입니다. 크게 노하여 대회를 열고 귀인과 민장을 꾸짖는 6~8,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설득하는 9~11, 이에 민장과 귀인들이 느헤미야의 말대로 시행하기로 하자 맹세하는 12, 13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1차로 꾸짖고 나서, 2차로 설득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느헤미야는 귀인들과 민장들을 맹세시켜 다시는 그러한 사회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처하였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에게 꾸어준 돈에 대해서 이자를 받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같은 언약의 백성인 동족에게는 이자를 받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또한, 동족에게 돈을 빌려주더라도 채권자로서의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자비롭게 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동족에게 이자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자비롭게 행하기는커녕 동족이 이방인에게 팔리는 것도 묵인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엄하게 책망하고 나서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권고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부터 율법을 준수하는 태도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구체적으로 당시 저당 잡았던 것들의 1/100을 동족에게 돌려줄 것을 설득합니다. 이것은 느헤미야가 신명기 율법의 근본정신을 적용한 것으로 오늘날 어려운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 13절은 당시 사회 문제로 다시 재발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이러한 난제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고, 선민으로서 지켜야 하는 율법을 범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당시 저주의 맹세에 대한 상징적 행위를 통하여 그 사실을 지킬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한편, 이와 같은 사실은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귀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금 노예로 전락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에서 노예로 지냈던 유다 백성들이 이제는 자신들의 고향에 와서 경제, 사회 문제 때문에 또다시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노예 생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이제는 동족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느헤미야는 이 사회적 난제를 해결코자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14~19, 자신의 내적 생활을 회상함으로써 유다 사회에 만연해 있던 사회 문제를 어떻게 해서 해결했는가 하는 점을 밟힙니다. 본문의 포로 귀환 이후 이스라엘 전역에 걸쳐 심각히 퍼져 있던 사회,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그 해결책이 왜 설득력이 있었는가 하는 점을 밝히는 대목입니다. 타 유다 총독과 느헤미야 자신과의 비교를 통해 청렴결백함을 주장한 14~16절과 느헤미야 자신에게 베풀어진 양식을 열거하면서도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17, 18,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한 19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 자신이 왜 합법적 녹을 포기했는가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총독으로 온 것은 하나님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살피고 성벽을 재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시 백성들의 실제 생활을 목도한 느헤미야에게 있어 백성들을 압제하고 토색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유다로 보낸 목적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심을 소유했기에 그 녹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앞에서 잠시 살펴본 대로 당시 유다 백성들이 겪는 고통은 이루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느헤미야가 백성들이 겪는 고통은 이루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느헤미야가 백성들의 부역의 중함을 알고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것은 당연합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국가와 민족을 위한 느헤미야의 처신과 조처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귀감이 되는 행위입니다.

 

한편, 19절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겸손과 신뢰를 서정적으로 표현한 다윗의 시(131)와 유사할 뿐만 아니라 위로의 응답을 간구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기도(15:15~18) 와도 비슷합니다. 이와 더불어 그의 태도는 봉사의 대가를 받지 않고 친히 애써 주야로 일해 생활비를 마련한 바울의 신앙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지도자의 진위는 그 지도자가 백성 혹은 회중을 사랑하는지의 여부로써 판명되며 지도자가 백성 혹은 회중을 사랑하는지의 여부로써 판명되며, 그 지도자의 모범적 삶은 회중에 대한 지도자의 말씀 선포를 보다 강력하게 함을 깨닫습니다.

 

특히 우리 한국 교회 안에는 기복 신앙이 너무 팽배해 있습니다. 이제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가난의 정신과 그 진가에 눈을 돌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려운 지경에서 느헤미야가 보여준 태도는 좋은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 대가 없이 봉사하고 그것으로 종자들을 가르치며, 자기 것까지 베풀어 주는 정신은 가히 천상적인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실로 복음적인 청빈만큼 복된 것은 없다는 사실을 가슴속에 간직해야겠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포기할 기득권이 있다면 포기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사로운 욕심을 절제하길 원합니다. 내게 있는 작은 기득권이라도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서는 포기하길 원합니다. 우리나라 정치가들에게 느헤미야와 같은 신앙과 마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